2017-12-26 | 남편이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요!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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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용 |
남편이 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요!
한 눈에 보기에도 똑똑해 보이는 여성이 내원하였습니다.
똑똑해 보인다는 말은 그러니까
긍정적인 측면도 물론 있지만 한편으로는 뭐랄까...
다른 사람은 그를 피곤하게 느낄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.
본인이 일단 잘나고 똑똑하면, 이런 경우는
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렵습니다.
타인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고 노력을 하고,
많은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접해보지 않으면
‘아! 다른 사람들은 나 같지 않구나.’라는 것을 알 수 없지요.
나 같지 않은 사람들,
즉 나보다 무엇인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잘 못하는 사람과
무슨 일을 함께 하려니 화가 납니다.
답답하고 비효율적이고 내가 생각하는 데로
일처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.
이렇게 경력도 화려하고, 실제로 머리도 좋아
미국에서 유학해서 박사 학위를 받고
국내 유수의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이었습니다.
임신 시도를 한지는 이제 아직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으나,
결혼은 4년 전에 했고 본인의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어서고,
양방 호르몬 검사 상 난소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
많은 연령대의 수치로 나와 걱정이 앞서서 내원한 경우였습니다.
하지만 결혼 후 피임 기간이 1년 11개월로,
그 기간을 제외하면 아직 불임을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.
그러나 월경 주기가 20대부터 짧았고,
회사에서 업무 부담이 많고,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.
2세 연상의 남편은 정액 검사에서 기형 정자 비율이 1%로,
양방 병원에서는 정상 정자의 수가
자연 임신을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고,
시험관 임신을 해야 하는 경우라고 했습니다.
환자는 매우 성실한 편이었습니다.
성실한 사람은 결과가 빨리 보이지요.
치료 과정에서 생리 주기가 27-28일로 길어지고
생리 전 여드름 증상도 점차 호전되고,
늘 상 결리던 어깨, 뻣뻣하던 목의 통증도 줄어들고
아침 기상 시 힘들던 것도 좋아지는 등, 몸의 상태는 호전되고 있었습니다.
하지만, 환자는 늘 화(火)가 나 있었습니다.
회사 상사에 대해, 동료에 대해, 여동생에 대해,
남편에 대해 화가 나서 본인이 열(熱)을 받고 있었습니다.
업무에서 자신의 공을 가로채고 과도한 일을 시키는 상사
일의 처리 속도가 늦고 잘 못해 걸리적거리는 동료,
임신부터 ‘턱’ 해서 결혼하려는 여동생,
본인이 생각하기에 불필요하게 예민하고 뭔가 답답한 남편...
도대체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
만사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고 늘 불평을 해대었습니다.
가장 힘들어하는 것은,
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인지
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.
“남편이 애를 낳으면 좋겠어요.
왜 나만 이런 부담을 가지고 임신을 준비해야 하는지
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화가 나요!”
라고 말하셔서 참 안쓰러웠습니다.
요즘이 옛날보다 여자가 살기 편해졌다고 하지만...
사실 어떤 측면으로는 여자로서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느껴집니다.
여자지만, 교육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,
사회에 진출하기가 예전보다 더 수월해졌다고는 하지만,
아직도 여자는 남자보다 더 공부도 잘하고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
더 잘해내야 비슷한 자리에라도 갈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.
이렇게 투쟁하듯이 쟁취해낸 결과로,
똑같은 회사에 다니고 똑같은 직군에 종사해도 결혼을 하게 되면
가정에서는 아직도 뭔가가 심히 불공평한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.
나의 세대보다 대략 10년 이전의 여성 선배들은
그 불공평이 더 심했을 테고,
그러니 많은 여성들이 그로 인해 이혼도 불사했을 것입니다.
저도 그 문제가 내면에서 아직 편안하게 해소되지 못해
내면에 갈등의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.
저보다 더 어린 여성, 특히 능력이 있어서 그 능력을 발휘하며
사회의, 기업의 일꾼으로 종사하고 있는 이 환자는
여성으로서, 여자가 해야만 하는 임신이라는 성취가
생각대로 되지 않으니 정말 억울했을 것 같습니다.
그러니 남편이 차라리 임신을 대신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.
나름대로 많이 배려하고 도와준다고 하는 남편이었겠지만,
성에 차지 않았을 것입니다.
이 여성 환자에게
“그런데 어떻게 하냐. 당신이 여자로 태어난 것을.
남자로 안 태어나서 그런 것을 어쩌면 좋겠냐.”
이렇게 말을 해보지만.....사실은 우리 환자에게 더 공감이 갑니다.
우리나라가 여성으로 살아도,
미혼 뿐 아니라 기혼으로 살아도, 아이가 없어도 있어도,
여성이 일하고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데
좀 더 현실적으로 편안한 세상이라면
이런 억울함은 덜 하지 않을까요.
‘아이를 남자가 낳았으면 좋겠다고,
왜 내가 여자라 이렇게 고난의 길을 가고 있나!’,
이런 생각이 한 똑똑한 여자의 철없는 푸념으로만 치부하기에는
저도 여자인데다가 한의사이고
세 아이의 엄마로 사는 삶의 고단함이 있는지라 맘이 씁쓸했습니다.
저출산의 문제는 여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,
사회 전체에 여러 가지 상황들이 얽혀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.
특히 더 이상 여성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며,
그것이 진정한 모성의 발휘임을 설명하고
설득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.
여자로 태어난 사람이 여성성을 발휘하고 싶게,
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상황이 조성이 되어야,
즉 결혼을 하고 싶거나 할 수 있는 세상,
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낳을 수 있거나 아니면
결혼 여부와 관련 없이 엄마가 돼서 육아를 하는 것이
짊어질 수 없는 너무 큰 부담이 되지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.
영화 「Children of men」을 보았습니다.
미래에 인류가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고,
모두가 불임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가 그 영화의 배경이었습니다.
세상의 모든 여성이 임신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 지나,
한 흑인 소녀가 20년 만에 잉태를 해서
그 소녀가 출산을 하도록 돕는 과정이 나옵니다.
거의 신성에 가까운 임신한 여인과 태어난 아기,
영화인데도 그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기를 바라는 제 마음이 절절 했더랬습니다.
지금쯤은 힘들어했던 그 환자가
그토록 바라는 아이가 생겨서 억울했던 맘이 풀렸는지 궁금합니다.
공부도 많이 하고 일도 열심히 하지만,
아이도 셋 이상을 낳고 싶다고 했었습니다.
그 가족계획이 꼭 실현되기를 빌어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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